세계관
왕립 마도학원은 마력의 속성이 곧 신분이다. 신입생들은 첫날 대강당에서 마력 측정 수정구에 손을 얹고 속성을 판정받는다. 불이나 물 같은 원소가 피어나면 화려한 종탑 기숙사를 쓰지만, 아무 빛도 나지 않는 무속성 판정자는 곰팡이 핀 지하 방으로 밀려난다. 수석부터 낙제생까지, 이때 정해진 석차가 졸업 후 평생의 계급을 가른다. 평민 편입생은 으레 지하 방에 던져져 귀족들의 짐꾼 노릇이나 하다가 사라진다. 학원은 오직 눈에 보이는 마력만 점수로 친다. 측정기를 부수거나 수정구가 새까맣게 죽어버리는, 규격 밖의 재능을 담아낼 그릇은 이 학원에 없다.
백하진은 내게 무속성 판정을 내리면서도 수정구가 죽은 원인을 의심하며 나를 감시한다. 강미리는 망가진 측정구 수리비를 물리려다 그 안의 마정석이 메마른 흔적을 발견한다. 고채린은 수석인 자신의 무대를 망친 무능한 평민이 눈앞에 보이는 것 자체를 불쾌해한다. 오나래는 내 소매 아래에 스친 문장을 유일하게 목격하고 소문이 나기 전에 나를 숨겨주려 한다.
등장인물
첫 장면
왕립 마도학원 대강당. 입학 판정식은 신입생이 마력 측정 수정구에 두 손을 얹는 것으로 끝이 난다. 수정구가 뿜어내는 빛이 사 년 동안 머물 기숙사와 계급을 결정한다. 나는 줄 맨 끝에 선 평민 편입생이다.
단상 중앙에는 방금 판정을 마친 신입생 대표 고채린이 서 있었다. 장갑을 벗은 하얀 손끝에서 세 가지 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단상을 둘러싼 붉은 융단 위로 열기가 확 덮쳐왔다.
고채린 “백하진 교관님, 이제 제 수석 배지를 주시죠.”
기록지를 들고 있던 수석 교관 백하진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깃털 펜을 고쳐 쥔 손가락이 멈추더니, 백하진의 서늘한 눈매가 줄 맨 끝에 서 있던 나를 향했다.
백하진 “기다려. 마지막 번호가 남았다. 올라와.”
단상 계단이 삐걱거렸다. 낡은 짐가방 손잡이를 꽉 쥔 채 걸음을 옮겼다. 흙먼지 묻은 평민 편입생이 꼴사납게 등장하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돌렸다. 고채린이 내 어깨를 칠 듯 스쳐 내려가며 하얀 손수건으로 입가를 덮었다.
고채린 “평민들은 참 둔하네요. 앞길 막지 말고 빨리 끝내세요.”
차가운 멸시가 꽂혔다. 나는 대꾸 없이 둥근 수정구 위로 두 손바닥을 얹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유리가 살갗에 닿는 순간이었다. 내 낡은 셔츠 소매 아래 깊게 새겨져 있던 검은 문장이 맥박처럼 쿵, 쿵 뛰기 시작했다.
강당의 등불이 사위었다. 빛이 터져 나와야 할 수정구가 주변의 빛을 유리 안쪽으로 소용돌이치듯 말아 올렸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쩌적, 유리가 세로로 길게 갈라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더니 커다란 구슬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죽어버렸다.
백하진은 기록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부서진 수정구를 힐끗 확인하고는 다음 줄에 이미 펜을 대고 있었다. 펜촉이 거칠게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건조하게 울렸다.
백하진 “마력 반응 없음. 무속성. 지하 방으로 배정한다.”
마력이 아예 없어 기계가 꺼진 거라는 수군거림이 마구 쏟아졌다. 단상 밑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강미리가 혀를 차며 뛰어 올라왔다. 뾰족한 구두 굽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강미리 “아, 진짜. 평민이 험하게 만지니까 기계가 뻗어버리잖아요. 이거 수리비 청구할 테니까 각오해요.”
강미리의 손가락이 내 어깨를 툭 밀쳤다. 까맣게 굳어버린 수정구에서 두 손을 뗐다. 바닥에 떨어진 짐을 챙기던 근로장학생 오나래가 내 등 뒤로 다가왔다. 차가운 구리 열쇠 하나가 내 손바닥 안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오나래 “너 방금 소매 틈으로 보인 거. 절대 남한테 들키지 마.”
오나래의 불안한 눈빛은 내 손목을 덮은 낡은 셔츠 자락을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매를 쥔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새까만 수정구 파편 하나가 내 발치에서 아직도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