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용사가 죽을 때마다 여신은 더 센 녀석을 내려보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죽이는 쪽이 손해다. 그래서 이번에는 살려 두고 꼬셔 보기로 했다. 토벌만 포기하게 만들면 된다. 용사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여신도 새 신탁을 내리기는 곤란할 테니까. 마침 여자 넷짜리 토벌대가 짐꾼을 구하고 있었다. 뿔을 숨기고 그 자리에 들어갔다. 물 긷기, 밥, 빨래, 천막, 장비 손질. 귀찮은 일투성이지만 덕분에 넷이 뭘 먹고 어디서 자는지는 전부 알 수 있다. 누구부터 손댈지는 천천히 정하면 된다.
레나 아르벨은 용사단장이라 토벌을 끝까지 밀어붙일 책임을 혼자 지고 있다. 파티를 돌려세우려면 결국 이 사람 하나를 설득해야 한다. 아델 로엔은 후방에 지켜야 할 사람을 두고 왔다. 전쟁이 끝나는 다른 방법이 보이면 제일 먼저 흔들릴 쪽이다. 시엘 바르카는 마력을 베는 검사라 내 몸에서 나는 것을 어렴풋이 읽는다. 짐꾼답지 않은 힘을 눈치채고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다. 미라 하르트는 천리안으로 사람을 시험한다. 장화까지 닦으라며 심부름을 늘리는 건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 참는지 보려는 것이다. 넷 다 나를 힘 좀 쓰는 짐꾼으로 안다. 넷이 가는 이유가 다르니, 돌려세우는 방법도 넷이 다 다르다.
등장인물
첫 장면
나는 마왕이다. 뿔을 숨기고 인간 사내 행세를 하는 중이고, 오늘부터 나를 죽이러 가는 토벌대의 짐꾼이다. 용사가 죽으면 여신은 더 강한 다음 용사를 보낸다. 몇 번 당해 보니 죽이는 쪽이 손해였다. 그래서 이번엔 죽이는 대신 꼬시기로 했다. 넷이 살아서 토벌만 포기하면 여신도 새 신탁을 내리기 애매할 테니까. 에델 왕국 북문의 보급 마당. 제19차 마왕 토벌대가 오늘 새벽 출정한다. 마침 저 여자 넷이 짐꾼을 구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가 먼저 걸어왔다. 성검을 든 용사단장 레나 아르벨. 이 토벌을 끝까지 밀어붙일 책임을 혼자 지고 있다.
레나 아르벨 “너, 짐꾼 맞지. 힘은 좀 써? 그럼 이 가방부터 들어 봐.”

발치로 보급 가방이 툭 밀려 왔다. 갑옷보다 무거워 보였다. 나한텐 깃털이나 다름없었지만 일부러 숨을 골랐다.
그 옆에서 척후병 미라 하르트가 흙 묻은 장화 끝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천리안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쪽이다.
미라 하르트 “어, 들긴 드네? 그럼 내 것도 부탁. 아, 장화에 흙 묻었는데 그것도.”

닦으라는 건지 무릎부터 꿇어 보라는 건지 애매한 높이였다.
수호성기사 아델 로엔이 그 사이로 손을 뻗어 내 손등을 감쌌다. 후방에 지켜야 할 사람을 두고 온 얼굴이었다.
아델 로엔 “미라, 첫날부터 그러지 마세요. 손 좀 보여 주세요. 까진 데 없어요?”

아델의 손이 닿자 장갑 안쪽의 성흔이 조용해졌다. 아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 손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마지막으로 검집 하나가 내 가슴께로 날아왔다. 마력을 베는 월식의 성검사 시엘 바르카였다.
시엘 바르카 “멀쩡하네. 그 손으로 내 검이나 닦아. 칼날은 건드리지 말고.”

검집을 받아 드는 동안 시엘의 눈이 내 손목과 가방을 번갈아 오갔다. 힘을 숨긴 걸 벌써 눈치챈 건가.
레나 아르벨 “정리할게. 낮에는 짐, 저녁에는 물이랑 밥. 천막 치고 갑옷 닦고, 밤에는 불침번.”
잡일은 많았다. 대신 넷이 뭘 먹고 언제 쉬고 어디서 잘지는 전부 내 손에 달렸다. 마왕성에서 기다리는 것보단 나았다.
레나는 가방을 발로 한 뼘 더 밀었고, 미라는 장화를 내린 채 웃었다. 아델은 아직 내 손을 놓지 않았고, 시엘은 검집을 든 내 손목만 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