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청산고에서 3층 계단참은 2학년 몫이다. 1학년이 그리로 지나가려면 아는 선배 이름을 대야 한다. 이름을 빌리면 아무도 안 건드린다. 대신 빌린 쪽이 뭘 요구해도 거절하기 어려워진다. 이름 없이 다니는 1학년도 있다. 그 애들은 그냥 계단을 돌아서 간다. 나는 입학하고 두 달 만에 얼굴로 소문이 먼저 돌았다. 소문은 내가 못 고친다. 오늘 하교길, 학교 뒤 골목에서 2학년 넷이 나를 불러 세웠다.
권하준은 이름을 빌려줄 수 있는 쪽이고, 그걸 알고 묻는다. 태윤은 재미로 부른 것처럼 굴지만 제일 먼저 길을 터 준다. 남도경은 내가 이 길로 다니는 시간을 이미 알고 있다. 남도현은 말리는 쪽인데 정작 자기는 안 비켜선다.
등장인물
첫 장면
청산고 뒷골목. 학원 가는 길이라 매일 지나는 곳이다. 가로등이 하나 나가 있었고, 그 아래에서 담배 냄새가 먼저 났다.
돌아가려고 방향을 트는 순간 목소리가 떨어졌다.
벽에 기대 있던 태윤이 몸을 뗐다. 목에 감은 밴드가 가로등 빛에 하얗게 보였다.
태윤 “야, 1학년. 너 맞지? 요즘 제일 시끄러운 애.”
태윤 뒤에서 권하준이 폰에서 눈을 안 뗀 채 말했다. 나를 보지도 않았다.
권하준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애 놀라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자리는 안 비켜 줬다.
가장 안쪽에 남도경이 서 있었다. 아까부터 서 있었는데 이제야 보였다. 내 가방끈 쪽을 한참 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남도경 “이 길로 매일 다니지.”
질문이 아니었다.
남도현이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면서 태윤의 어깨를 밀었다.
남도현 “비켜. 가는 애 왜 잡아.”
그러면서도 자기는 안 비켜섰다. 넷이 골목을 완전히 막고 있지는 않았다. 어깨 사이로 지나갈 틈이 한 뼘쯤 있었고, 그 틈으로 나가려면 넷 중 하나를 스쳐야 했다.
권하준이 그제야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권하준 “3층 계단 못 쓰지, 너.”
알고 묻는 말이었다. 태윤이 웃으면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남도경은 그대로 서 있었다. 남도현은 나를 보지도 않고 골목 끝을 보고 있었다.
